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도비쿠스 1세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778년 4월 16일 [[프랑크 왕국]] 카시노길룸에서 [[카롤루스 대제]]와 두번째 왕비인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이복형으로 '곱사등이' 피핀이 있었고, 친형으로 [[피핀 카를로만]], '청년왕' 샤를이 있었으며, 누이로 아델라이드, 베르타가 있었다. 함께 태어난 쌍둥이 형제 로타르는 779년에 [[요절]]했다. 781년 4월 15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그를 아키텐의 부왕으로 기름부었고, 형 피핀 카를로만을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기름부었다. 이후 아키텐으로 보내져서 아버지가 보낸 가신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794년 잉그램 백작의 딸인 에르망가르트 폰 헤스펭가우와 결혼하여 [[로타리우스 1세]], 피핀, [[루트비히 2세]], 로트루드, 힐데가르트를 낳았다. 801년 또는 803년에 카롤루스 대제의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전쟁에 참가해 아키텐의 기욤과 아들 베라와 함께 무어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바르셀로나]]를 탈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812~813년 [[바스크인]]들의 반 프랑크 봉기를 진압했고, 813년 총회에서 게르만족의 주신 [[오딘]]의 축제를 대천사 [[미카엘]]의 날로 대체하기로 결의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806년에 디덴호펜에서 사후를 대비한 제국 분할안을 작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루도비쿠스 1세는 셉티마니아, 프로방스, 부르고뉴를 분할받고 피핀 카를로만은 바이에른과 이탈리아, 남부 알레마니아, 라에티아를 받으며, 청년왕 샤를은 아우스트리아 및 알레마니아를 수여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피핀 카를로만과 청년왕 샤를이 각각 810년과 811년에 예기치 않게 사망하는 바람에, 루도비쿠스 1세는 졸지에 카롤루스 대제의 유일한 합법적인 아들이자 상속인이 되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와 여러 신하들은 루도비쿠스가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을 지에 의구심을 품었고, 812년 피핀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이탈리아 국왕)|베른하르트]]를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웠다. 813년 9월 11일, 루도비쿠스 1세는 아헨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에서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루도비쿠스 1세의 전기 작가 트리어의 테간(Thegan of Trier)은 루도비쿠스 1세 본인이 왕관을 썼다고 기술했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카롤루스 대제가 아들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는 제국 연대기에 더 믿을 만하다고 본다. 이후 아키텐으로 돌아와 부왕으로서 통치를 이어가던 그는 814년 1월 28일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아헨으로 이동하여 제국 전체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816년경 교황 [[스테파노 4세]]의 주관하에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다시 기름 부음을 받고 면류관을 썼다. 이후 프랑스 국왕들은 이를 본받아 대대로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